한국의 기타리스트 - 이현석[김창완 라라라 인터뷰 Sky High, 여의도 블루스] - 추천비디오 - 모터핑거

모터핑거

일렉기타 통기타 베이스 강좌 커뮤니티

한국의 기타리스트 - 이현석[김창완 라라라 인터뷰 Sky High, 여의도 블루스] - 추천비디오 - 모터핑거  한국에서 잉베이 맘스틴의 위상은 조용필이 - 일렉기타 통기타 베이스 강좌 커뮤니티

모터핑거 알림:

내용

혼자 보기 아까운 비디오나 사진, 글등을 서로 공유하는 곳입니다. 유용한 자료를 보셨다면 추천해주세요.

나를부탁해 10년 전 조회 2,901 댓글 0
URL

http://www.motorfinger.net/22259 복사

 

한국에서 잉베이 맘스틴의 위상은 조용필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표절할 정도로 대단했다. 조용필 『9집』에 수록된 「청춘 시대」는 잉베이 맘스틴의 「Far Beyond The Sun」의 표절곡으로 판명 났고, 이 사건은 조용필에서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됐다.

지미 핸드릭스 이후 일렉트릭 기타가 주연이 된 적은 거의 없었다. 에릭 클랩튼, 제프 벡, 지미 페이지, 리치 블랙모어, 에드워드 벤 해일런 같은 명장들이 그 자리를 노렸지만 기타 연주의 일대 전환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에도 신중현이라는 거장이 있었지만 그의 실험성보다는 그가 배출한 가수들의 노래만 주목받았다.

1984년 대중음악계에 일대 혁명이 불어온다. 바로 잉베이 맘스틴의 출현이다. 락에 클래식을 접목시킨 그의 『Rising Force』는 일렉트릭 기타가 곡의 주가 됐고 방법은 현란한 속주론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사건이었다. 세계는 잉베이 맘스틴의 연주에 경악했고, 한때나마 기타리스트와 기타 키드들에게 잉베이 맘스틴의 연주는 선망이 되었다.

국내에서도 김태원과 김도균, 배재범을 비롯한 많이 이들이 잉베이식 속주를 시도했지만 그네들의 세련된 음감과는 애초 비교불가였고, 녹음기술의 한계가 있었다. 기타리스트의 색깔보다는 누가 멜로디컬하게 ‘빨리 치나’의 장에 불과했다.

8년이라는 가위눌림을 지나 90년대 초반 이현석이라는 생소한 뮤지션이 등장한다. 그의 연주는 잉베이 맘스틴을 연상시켰고, 「Sky High」는 「Far Beyond The Sun」에 비견되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현석의 연주는 빠르고 어려운 주법을 사용했지만 정교했고 대중적이었다. 이현석은 바로크 메탈이라는 특정 장르에서 벗어나 모방에 머물지 않고 김태원의 증언처럼 “한국적인 스타일에 맞춘 음악을 지향”했다. 이는 그가 꾸준히 부클릿에 감사의 대상으로 삼는 김수철과 송골매의 명기를 봐도 알 수 있다.

『1집』에서 이현석은 「Sky High」 단 한곡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곧이어 발표된 『2집』 수록곡들은 각종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으로 쓰였고, 「학창 시절」은 〈가요톱텐〉에 등장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현석의 『2집』은 어느 한 곳 나무랄 데 없는 앨범이었고 당당히 성공을 이끌어 낸다.

1, 2집의 성과에 자신감을 얻어 발표한 『3집』은 1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에, 14곡을 수록하지만 이게 과도했다. 좋은 멜로디는 여전했고, 공격적인 리메이크 「세상만사」가 앨범을 요약하지만 기존과 같은 패턴이었고 식상했다.

이현석은 3년 후, 절치부심 끝에 98년 비극의 상흔(어머님의 귀천)을 담은 『4집』을 발표한다. 『4집』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2집』에 버금갔지만 IMF와 인디의 득세로 인해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특히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묻히기에는 아까운 곡이었다.

이현석은 3, 4집의 실패(?)를 성찰하고 자신의 음악에 변화를 준다. 99년 이현석 프로젝트를 결성, 그간 약점으로 지목되었던 보컬 자리에 김성은을 영입하고, 밴드체제로 팀을 재정비한다. 메시지는 대중성보다는 사회비판을 담았다. 이게 의외의 장면이다.

성공 관행보다는 오히려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 그의 자존심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볼 수 있는 좋은 대목이다. 그는 실패하더라도 비켜가려 하지 않았다. 아이러니를 담은 「스타가 되기까지」는 너무도 훌륭했다.

21세기 들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속주나 잉베이 맘스틴을 언급하지 않았고, 이현석은 잊혀져 갔다. 재능 있던 뮤지션의 몰락은 현실에서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이현석이 더없이 그리웠던 건 음악에 대한 자세 때문이었다. 그는 현란한 기능보다는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지향했고, 과장하기 보다는 정직한 소리를 담으려 노력했다. 그에게 기타는 자신의 말이었고 존재 증명 이유였을 뿐이다.

2005년 드디어 이현석은 “Come Back"한다. 돌아온 이현석은 깊어졌고, 자신 신념에 가득 찼다. 이현석 프로젝트에서 보였던 사회 인식은 더욱 날을 세웠고 날카로워졌다.

「위험한 댄스」, 「안녕히 가세요」, 「일등」, 「서울로」, 「욕망은 달린다」에서 이현석은 대한민국 곳곳의 부조리를 파헤쳤고, 그간 그를 기다려온 팬들에게 변함없는 이현석식 연주곡 「Asian Power」와 「위풍당당 행진곡」을 헌사 한다.

세월은 이현석에서 좌절보다는 음악의 확신을 강화했고, 성공에 대한 조급증보다는 연륜을 선사했다. 그의 5집 『Myself』는 변함없는 스스로의 약속이었다.

신대철은 한국에서 기타리스트가 솔로로 활동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힘든지 토로한 적이 있었다. 기껏해야 연주인으로 앨범 한 장 낼 수 있는 풍토에서 이현석은 10년 이상을 견디어냈고, 6장의 적지 않은 앨범을 발표했다.

이현석의 일관된 고백은 장인의 모습처럼 장엄하다. 그는 「My Self」를 연주하며 "언제나 기타리스트로 평생을 다할" 다짐을 한다. 비록 현실은 비루하지만 이현석이 펼치던 정면승부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하는지 본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http://ballad.egloos.com/4950859 발췌]

 

페이스북 트위터
페이스북 트위터
http://www.motorfinger.net/22259/URL복사
댓글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 주세요.

공지사항

서비스 전체보기 >
서버 접속중...
음소거를 해제 해주세요.